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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정부가 고(故)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에 대해 정치권 안팎에서 찬반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국민훈이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학술분야에 공적을 세워 국민의 복지향상과 국가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한다. 1)무궁화장 2)모란장 3)동백장 4)목련장 5)석류장이 있다. 이름은 꽃에서 따왔다.

▶무궁화장(無窮花章)이란?
✔국민 훈장 가운데 첫 번째 등급의 훈장
국민훈장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은 국민적 추앙을 받는 사회원로에게 수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추서(追敍)
벼슬의 등급이나 훈장 따위를 죽은 후에 올려 주거나 수여한다.

무궁화장 수훈자 - 김수환 추기경(1970년 8월 수훈), 곽윤직(1995년 수훈), 진창현(2008년 10월 수훈), 김정수(2009년 4월 수훈), 황장엽(2010년 10월 추서), 이태석 신부(2011년 7월 추서), 정몽구(2012년 2월 수훈), 김평우(2012년 4월 수훈), 박한철(2017년 12월 수훈), 양승태(2017년 12월 수훈), 김종필(2018년 6월 추서예정)

우리나라의 훈장의 종류
총 12가지이며,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훈장을 제외한 11가지 훈장에는 5가지 등급이 매겨져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 훈장 중에 최고의 훈장은 무엇일까요. 궁금해지네요? 무궁화 대 훈장입니다. 김종필 전 국민 총리에게 추서한 훈장은 국민훈장 중에 무궁화장입니다. 최고의 훈장 무궁화 대 훈장이라고 오해하지 하지마세요.

✔최고의 훈장, 무궁화 대 훈장
우리나라 최고 훈장이라 할 수 있는 무궁화 대 훈장은 대통령에게 수여가 되며, 대통령의 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 또는 한국의 발전과 안전보장에 기여한 공적이 뚜렷한 전직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까지 수여가 됩니다.

"무궁화 훈장이 있으면, 사형도 면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이 말은 사실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무궁화 대 훈장을 받은 사람은 사형의 형을 받을 때에 훈장으로 대신 할 수도 있습니다.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 역시 "명암은 엇갈리지만 근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큰 어르신으로 국민은 기억할 것이다. 정부가 훈장을 수여한다고 하니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훈장 추서에 반발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김종필 전 총리에 대한 훈장 추서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습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훈장 추서를 취소하라는 글이 24일 오후까지 수십 건 올라왔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매국노 김종필 국가훈장을 반대한다'는 등의 비판 글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음식 칼럼니스트인 황교익씨는 페이스북에 "이런 식이면 전두환이 죽어도 훈장 줘야 한다는 말이 나올 것이다. 독재권력의 2인자로서 호의호식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말라. 이 자랑스런 민주공화정 대한민국의 시간을 되돌리지 말라"고 비판했습니다.

-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6월 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오전 향년 92세로 별세했습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습니다. 김종필(金鍾泌)은 1926년 1월 7일 태어나 2018년 6월 23일까지 무려 92년하고도 5개월을 살았습니다. 정말 오래 살았고 천수를 누린거라 봅니다.

죽은 사람에 대한 동정과 예의로 명복을 빈다는 마음은 이해하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를 애도한다는 것은 김종필에 의해 희생된 수 많은 이들에 대한 모욕이기도 합니다.

그럼 김종필이라는 사람이 누구냐면 1961년 5월16일 박정희와 함께 쿠테타을 일으킨 5·16 군사 정변 주역이며 박정희 조카딸 박영옥과 결혼해서 조카 사위라는 배경으로 1979년 박정희가 죽을때까지 박정희 시대의 2인자로 호의호식한 사람입니다.

▶김종필 오히라 메모 한일협정
1962년 당시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과 두 차례 단독회담을 하고 청구권 문제의 최종적인 합의를 끌어내고자 하였습니다. 회담 전에 김종필은 ‘독립축하금 또는 경제자립 원조금 명목으로 3시간 30분간의 협상 끝에 청구권 문제를 매듭지었고, 그 결과를 ‘메모’ 형식으로 작성했습니다. 주요 내용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외에 수출입은행 차관 1억 달러 도합 6억 달러로 합의하고 김종필은 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남기자는 제안을 했고, 이를 오히라 외상이 받아들여 메모가 작성되었습니다.

한일기본조약, 한일협정을 주도한 주역입니다. 한일협정이 공식체결된 것은 1965년 6월 22일입니다. 날짜로 보면 좀 소름돋기도 합니다. 한일협정으로 일본에 대한 모든 청구권이 없어져서 지금도 일본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 배상금을 인정하지 않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모든 법적 배상, 보상 책임을 일본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못하게 만들었고 지금도 많은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소송조차 제대로 못하고 한국 정부에서도 보상을 받지 못하게 만든게 바로 김종필 이자 때문입니다.

그 당시 "청구권 자금 3억달러에 민족의 자존심을 팔았다"고 학생들은 "박정희 하야"를 주장하며 한일협정 반대운동를 벌입니다.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서울대·고려대·연세대·단국대·동국대·성균관대·중앙대·한양대·홍익대·건국대·경희대·한신대·숭실대·충남대·충남대 농대 등의 대학생과 청주상고·제주상고 등 고교생 5만여명, 서울에서는 학생·시민 1만여명이 세종로 일대에 나왔습니다. 부산대·동아대·전남대·조선대·춘천농대·목포동광중고·인천공고 등 지역에서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박정희는 한일협정 반대 집회까지 계엄령으로 막은게 박정희 정권입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 창설
또한 김종필은 중앙정보부, 지금의 국가정보원 창설합니다. 1961년 5월 20일부터 1963년 1월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을 지내면서 중앙정보부는 수많은 민주주의 운동가와 그리고 죄 없는 시민들에게 간첩 혐의를 씌우고 고문하고 목숨까지 잃게 만든 대표적인 반인권 기관이었고 노태우 정부까지 이어지면서 박정희 정권 세력들의 안정과 영구집권을 위한 기관으로 충추적 역할을 합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인해 평생을 고통받고 지금도 트라우마로 인해 생활이 불가능한 실태조차 모르는 고통을 김종필은 평가 받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