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인 이희호 여사께서 6월10일 오후 11시37분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한 모습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1922년 9월21일생으로 만 97세가 되셨습니다. 유족들은 모두 임종을 지키면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에 여사님도 함께 찬송을 부르시며 편히 소천하셨습니다.

소천이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뜻으로 '죽음'을 가리키는 기독교적 용어이다. 성경에는 '데려가신다', '도로 찾는다',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의미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표현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2남 김홍업 전 의원과 3남인 김홍걸 민화협 상임의장 등 유가족들은 오전 10시 30분 빈소에 도착해 조문객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현재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핀란드 국빈방문 중으로  오전 11시20분 문희상 국회의장, 이해찬 대표, 손학규 대표, 박지원 의원 등 여야 지도부가 단체로 빈소를 찾았습니다.

이희호 여사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고 11시30분부터 유가족 조문이 시작됐습니다. 당초 공식 조문은 오후 2시부터였지만 이른 시간부터 조문 행렬이 몰려 조문은 11시30분으로 앞당겨졌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빈소는 깊은 슬픔 속에 정치권 인사들의 조문 행렬로 분주했습니다. 6월11일 오후 2시부터 시작되는 공식 조문에 앞서 동교동계 등 정치권 인사들은 빈소에 모여 장례절차를 논의했습니다.

▶ 이희호 여사 장례 일정 절차
이희호 여사의 장례 일정은 사회 명으로 여는 5일장으로 6월11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조문을 받기 시작합니다. 장례위원장은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 권노갑 고문이 맡았으며 이희호 여사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 입니다.

6월14일 오전 6시 발인형식 없이 운구절차에 들어갑니다. 이후 오전 7시 신촌 창천감리교회에서 장례예배가 거행되고 1시간의 예배 후에는 운구차와 유가족 차량이 동교동 사저를 거쳐 장지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소에 합장하게 됩니다.


▶ 이희호 여사 유언 전문 공개
이희호 여사님께서 610일 저녁 1137분 소천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1922년 9월21일생으로 만 97세가 되셨습니다. 유족들은 모두 임종을 지키면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에 여사님도 함께 찬송을 부르시며 편히 소천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두 가지 유언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금은 대통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이 유언을 받들어 변호사 입회하에 세 아들의 동의를 받아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유언 집행에 대한 책임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도록 당부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 장례는 유족, 관련단체들과 의논하여 김대중평화센터 주관으로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장>으로 하기로 하였습니다.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대학시절부터 여성지도자 양성과 여성권익신장을 위한 결심을 하시고 YWCA 총무를 역임하시는 등 평생 헌신하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 후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통일을 위한 동지와 동반자로서 함께 고난도 당하시고 헌신하셨습니다. 영부인으로서 양성평등법 제정, 여성부 신설 등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여성 재단을 만드시는데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또한 IMF 외환위기 때 결식아동을 위해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을 창립하셔서 어려운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장애인들을 위해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특히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동번영하기를 염원하셨고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을 방문해서 북한 어린이 돕기에 앞장섰고 계속 노력하겠다. 2015년에도 평화적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평양을 직접 방문하기도 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평생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늘 함께하시고, 김대중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한 일을 계속하시다가 소천하셨습니다.



▶ 문재인 대통령 "이희호 여사님을 추모합니다"
오늘 이희호 여사님께서 김대중 대통령님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조금만 더 미뤄도 좋았을텐데, 그리움이 깊으셨나봅니다. 평생 동지로 살아오신 두 분 사이의 그리움은 우리와는 차원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여사님, 저는 지금 헬싱키에 있습니다. 부디 영면하시고, 계신분들께서 정성을 다해 모셔주시기 바랍니다.

여사님은 정치인 김대중 대통령의 배우자, 영부인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1세대 여성운동가입니다. 대한여자청년단,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해 활동하셨고, YWCA 총무로 여성운동에 헌신하셨습니다. 민주화운동에 함께 하셨을뿐 아니라 김대중 정부의 여성부 설치에도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성을 위해 평생을 살아오신 한명의 위인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여사님은 "남편이 대통령이 돼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다" 하실 정도로 늘 시민 편이셨고, 정치인 김대중을 '행동하는 양심'으로 만들고 지켜주신 우리시대의 대표적 신앙인, 민주주의자였습니다.

지난해 평양 방문에 여사님의 건강이 여의치 않아 모시고 가지 못 해 안타까웠습니다. 평화의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드리고 싶었는데 벌써 여사님의 빈자리가 느껴집니다. 두 분 만나셔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겠지요. 순방을 마치고 바로 뵙겠습니다. 하늘 나라에서 우리의 평화를 위해 두 분께서 늘 응원해주시리라 믿습니다.


▶ 청와대 실장, 수석들이 이희호 여사님의 빈소를 찾았습니다.
핀란드 국빈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청와대의 실장과 수석들이 어제 별세한 고 이희호 여사님의 빈소를 찾아 조문했습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에는 노영민 비서실장, 김수현 정책실장,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조국 민정수석, 강기정 정무수석, 윤도한 국민소통수석,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 이용선 시민사회수석, 김외숙 인사수석, 주형철 경제보좌관, 정태호 일자리수석, 김연명 사회수석이 함께 했습니다.

청와대 실장과 수석들은 시민들과 함께 이희호 여사의 영정에 헌화하고 묵념하며 고인을 추모했습니다. 노영민 비서실장은 김홍업 전 의원과 김홍걸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 상임의장 등 유족들을 위로하고 "대통령께서 귀국하시는 대로 오시기로 했다"고 전했습니다.

노영민 비서실장은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이희호 여사님께서는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서 한생을 헌신하신 우리 시대의 큰 어른이셨습니다. 여성운동의 선구자셨고, 무엇보다 분단을 아파하신 그런 분이셨습니다. 문재인 대통령님께서도 정말 애통해 하시면서 귀국하시는 대로 찾아뵙겠다"고 말했습니다.




▶ 이희호 여사 서거에 김정일 위원장의 친동생 김여정 부부장이 조화 및 조의문 전달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6월12일 오후 5시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을 통해 故 이희호 여사 앞으로 조의문과 조화를 전달해 왔습니다. 북한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 등이 김정은 위원장의 조의문과 조화를 전달하러 판문점 북측 지역 내 통일각으로 나왔습니다. 남측에서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서호 통일부 차관, 장례위원회를 대표하여 박지원 의원 등이 나갔습니다.

정의용 실장은 김여정 부부장에게 "이희호 여사님 서거에 즈음해 김정은 국무위원장께서 조화와 함께 정중하고 각별한 조의문을 보내주신 데 대해 유족과 문재인 대통령님을 대신해 깊이 감사드린다. 여사님은 김대중 대통령님의 평생동지로서 우리 민족의 화합과 협력을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 오셨으며, 이에 우리 민족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오래 기억되실 것이다. 여사님을 함께 추모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평화롭고 번영된 앞날을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겠다는 우리의 다짐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용 실장은 "이희호 여사님은 6.15 남북공동선언 발표의 현장에 김 대통령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다. 이 여사님은 그제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용 실장은 마지막으로 "오늘 국무위원장께서 보내주신 조의문과 조화를 전달해 주시기 위해 먼길을 오신 김여정 제1부부장께도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장례위원회 부위원장인 박지원 의원은 "이희호 여사님께서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 민족의 평화 통일을 기도하시겠다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여사님의 기도로 오늘과 같은 소중한 자리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을 계기로 남북 대화와 북미 대화가 조속히 재개되는 것이 김대중 대통령님과 이희호 여사님의 바람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김정은 위원장께서 이희호 여사님에 대해서 각별한 감정을 가지고 김여정 제1부부장이 남측의 책임 있는 인사에게 직접 조의를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했습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은 또 부디 유족들이 슬픔을 이겨내고 김대중 대통령님과 이희호 여사님의 뜻을 받드시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남북 양측 인사들의 만남은 오후 5시에 시작해 5시 15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낸 조화와 조의문은 바로 이희호 여사의 장례식장으로 전달되었습니다.



▶ 이희호 여사 프로필
이희호 여사께서 1922년 9월21일 생으로, 부친 이용기씨와 어머니 이순이씨의 6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부친은 우리나라 의사면허 4호로 전북 남원 도립병원장과 경기 포천 도립병원장을 지냈습니다. 어머니 이순이씨는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이 여사는 모태신앙인이 됐습니다.

이화여고, 이화여전을 다녔으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학교가 문을 닫는 바람에 이화여전 졸업을 하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인 1946년 9월 다시 서울대 사범대에 입학했고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옮겼습니다. 서울대를 졸업한 후 이 여사는 미국 스칼렛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우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던 이희호 여사는 국단 부대장으로 사범대생 800명 앞에서 호령을 하기도 했으며 총학생회에서는 사범대 대표를 맡았습니다. 강원룡 목사는 "어느 대학에서 강연 후 학생들과 자기소개 시간을 가졌는데 그의 차례가 되자 “히히호호” 하며 크게 웃는 것으로 ‘희호’라는 이름을 소개했다"고 회고하며 젊은 시절의 이희호 여사는 이처럼 재기발랄하고 활동적인 여성리더였다.

DJ 김대중 대통령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희호 여사의 인생행로 전체를 흔들어버렸습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한 71년 대선 패배 이후 남편은 최고통치권자의 최대 정적이 되었고, 이희호 여사의 인생에도 가시밭길이 펼쳐졌습니다. 같은 해 계엄령이 선포되고 이른바 10월 유신이 단행돼 DJ의 망명, 납치, 구금, 연금 등이 이어졌고, 24시간 감시와 도청이 계속됐습니다. 이 와중에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교통사고로 다리를 절게 됐습니다.



1977년 정월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남편이 구속되자 이호희 여사는 1년 가까운 석방투쟁과 정치활동,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시달리면서 남편을 향한 그리움에 짓눌렸고 건강도 극도로 악화돼 있었습니다. 키 172㎝에 몸무게 43㎏,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도지는 관절염은 그녀의 마른 다리를 괴롭혔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쥔 채 소리 없이 울기도 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을 겪으면서 김대중, 이희호 두 사람은 부부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독재와 싸우는 조국의 지도자와 동지로 변해갔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려 넣었고 그녀의 내조 중에서도 남편에게 격려가 되었던 것은 편지였습니다. 남편이 옥중에 있을 동안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에는 가정사 외에 철학적, 신학적 논쟁거리, 남편의 투쟁에 대한 격려 등이 담겨 있었습니다.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요구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서적 1~2권을 끼워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편지는 남편은 물론, 이희호 여사 자신의 내일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때 쓴 편지는 1998년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남편이 연거푸 패배하자 무척 상심했으며 DJ가 1997년 대선 4수를 결심했을 때도 두말없이 다시 운동화 끈을 잡아맸고 여성, 사회 운동가였던 이호희 여사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행정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여성가족부의 모태가 되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장관들 임명장 수여식 때는 부부가 동반해서 임명장을 받는 새로운 관행이 저절로 생겨났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영부인이 된 후 가장 먼저 가진 직책은 결식아동을 돕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의 명예회장이었습니다. 사랑의 친구들 사단법인은 발족한 지 2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퍼스트레이디가 여성들을 위한 재단을 만드는 것이 타당한지, 정치적 후유증이 없을 것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해서 탄생한 것이 ‘한국여성재단’입니다. 1999년 한국여성재단이 발족하자 이희호 여사는 한국여성재단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가장 뚜렷한 업적 중 하나는 대통령 부인으로서 독자적인 해외순방 영역을 개척했다는 점입니다. 해외방문은 총 5차례로, 2001년도를 제외하고 매회 1회 이상 단독 해외순방에 나섰고 특히 역대 영부인으로서는 처음으로 2002년 5월 대통령을 대신해 유엔 아동특별총회에 참석해 의장국으로 임시회의를 주재하고 기조연설을 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재임 중 소록도를 두번 방문했는데 육영수 여사 이후 영부인으로는 처음 찾는 것입니다. 소록도 방문을 계기로 소록도에 자원봉사자들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었고 경호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년원 재소자들과 이들의 부모를 청와대로 초청해 격려했습니다. 또한 소년원을 영어와 컴퓨터 등의 특수교육을 하는 정보특화학교로 변모시켰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대통령 퇴임 이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옆자리를 지키며 퇴임후 활동을 도왔습니다. 꾸준히 불우이웃돕기와 기부운동을 위한 활동을 해왔으며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활동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