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영부인으로 평생을 민주화 운동에 힘써오신 이희호 여사께서는 지난 6월10일 저녁 11시 37분 별세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님은 1922년 9월21일생으로 만 97세가 되셨습니다. 유족들은 모두 임종을 지키면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에 여사님도 함께 찬송을 부르시며 편히 소천하셨습니다.

이희호 여사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은 이낙연 총리는 6월14일 오전 6시30분 세브란스 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식 이후 서울 창천교회에서 열린 이희호 여사 영결예배에서 장례위원장으로 추도사를 낭독했습니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이희호 여사의 영결식은 창천교회의 발인예배로 시작됐습니다. 영결예배는 고인을 보내는 인사말로 더욱 숙연해졌습니다.

새벽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추모객들로 가득찬 예배당에는 고인의 영정이 들어오자 고인의 삶을 추모하던 신도들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습니다. 여야 정치인은 물론 2000여명이 넘는 시민이 고인의 마지막 길을 눈물로 배웅했습니다.




이희호 여사 영결예배 이낙연 총리 추도
이제 우리는 한 시대와 이별하고 있습니다. 한국 현대사, 그 격랑의 한복판을 가장 강인하게 헤쳐오신 이희호 여사님을 보내드려야 합니다. 여사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라셨습니다. 그러나 여사님은 보통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으셨습니다. 대학시절 여성인권에 눈뜨셨고, 유학을 마치자 여성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드셨습니다. 평탄하기 어려운 선구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여사님은 아이 둘을 가진 홀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결혼 열흘 만에 남편은 정보부에 끌려가셨습니다. 그것은 길고도 참혹한 고난의 서곡이었습니다.남편은 바다에 수장될 위험과 사형선고 등 다섯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겪으셨습니다. 가택연금과 해외 망명도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여사님은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이 감옥에 계시거나 해외 망명 중이실 때도, 여사님은 남편에게 편안함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투쟁하라고 독려하셨습니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님이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봐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고백하실 정도였습니다.

여사님은 그렇게 강인하셨지만 동시에 온유하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숙직하는 비서들의 이부자리를 직접 챙기셨습니다. 함께 싸우다 감옥에 끌려간 대학생들에게는 생활비를 쪼개 영치금을 넣어주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미워하셨지만, 사람은 결코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여사님의 그런 강인함과 온유함은 깊은 신앙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압니다. 여사님이 믿으신 하나님은 기나긴 시련을 주셨지만 끝내는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려 주셨습니다. 남편은 헌정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셨습니다. 분단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 국민 최초의 노벨평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어떤 외신은 "노벨평화상의 절반은 부인 몫"이라고 논평했습니다. 정권교체의 절반도 여사님의 몫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김대중대통령님은 여성과 약자를 위해서도 획기적인 업적들을 남기셨습니다. 동교동 자택의 부부 문패가 예고했듯이, 양성평등기본법 제정과 여성부 신설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고 권익이 증진되기 시작됐습니다. 기초생활보장제 등 복지가 본격화했습니다. 여사님의 오랜 꿈은 그렇게 남편을 통해 구현됐습니다.

10년 전, 남편이 먼저 떠나시자 여사님은 남편의 유업을 의연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북한을 두 차례 더 방문하셨습니다. 영호남 상생 장학금을 만드셨습니다. 여사님은 유언에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사님의 기도를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제 남은 우리는 여사님의 유언을 실천해야 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신 여사님의 생애를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합니다. 여사님, 그곳에는 고문도 투옥도 없을 것입니다. 납치도 사형선고도 없을 것입니다. 연금도 망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대통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십시오. 여사님,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난과 영광의 한 세기, 여사님이 계셨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음을 압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이희호 여사 국립 현충원 추모식
창천교회에서 영결예배 후 이희호 여사 운구행렬은 1963년 김대중 대통령과 신혼살림을 차린 뒤 별세 전까지 살았던 동교동 사저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자택 접견실의 김대중 대통령 영정 옆에 이희호 여사의 영정이 나란히 놓였습니다.
 
그리고 6월14알 오전 9시30분 추모식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엄수됐습니다.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추모식에는 각 여야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총출동했으며 민주당은 30여명 이상의 의원들이 참석해 행사장을 빼곡히 매웠고, 해외 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을 대신해 청와대에서는 노영민 비서실장과 강기정 정무수석비서관 등이 자리했습니다.

미국 국무성은 이례적으로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서거에 대해 조의를 표했고 모건 오테이거스 미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미국 정부를 대표해 이희호 여사의 가족과 한국 국민에게 애도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희호 여사의 추모식 사회는 진선미 장관이 맡았으며 추모식 후에 이희호 여사님은 국립현충원 김대중 대통령 묘역에서 진행된 안장식을 끝으로 이별을 고했습니다.


<이희호 여사 추모식 추모사>
우리는 이 시대의 위대한 인물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현대사의 고난과 영광을 가장 강렬하게 상징하시는 이희호 여사님을 보내드려야 합니다. 여사님은 의사의 딸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보통의 행복을 누리실 수도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여사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평탄할 수 없는 선구자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시대를 앞서 여성운동에 뛰어드셨습니다.
 
특히 여사님은 아이 둘을 가진 홀아버지와 결혼하셨습니다. 남편은 결혼 열흘 만에 정보부에 끌려가셨습니다. 지독한 고난은 그렇게 신혼을 덮치며 시작됐습니다. 남편은 일본에서 납치돼 알 수 없는 바다에 수장되실 뻔했습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다섯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겪으셨습니다. 가택연금과 해외 망명도 이어졌습니다. 장남도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여사님 스스로도 어린 아들들과 감시 속에 사셨습니다.
 
그런 극한의 가시밭길을 여사님은 흔들림 없이 이겨내셨습니다. 감옥에 계시는 남편을 생각해 한겨울에도 방에 불을 넣지 않으셨습니다. 남편이 감옥에 계시거나 해외 망명 중이실 때도, 남편에게 편안을 권하지 않으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에 따라 투쟁하라고 독려하셨습니다. 훗날 김대중 대통령께서 "아내에게 버림받을까 봐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고백하실 정도였습니다.
 
여사님은 그렇게 강인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온유하셨습니다. 시위 현장에서 당신을 가로막는 경찰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셨습니다. 함께 싸우다 감옥에 갇힌 대학생들에게는 생활비를 쪼개 영치금을 넣어주셨습니다. 동교동에서 숙직하는 비서들의 이부자리를 챙기셨습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죄는 미워했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나긴 고난의 끝에 영광이 찾아왔습니다. 남편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셨습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셨습니다. 분단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하셨습니다. 우리 국민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으셨습니다.

여사님은 평생의 꿈을 남편을 통해 하나씩 이루어 가셨습니다. 여성부가 신설되고, 여성총리가 지명됐으며, 양성평등기본법이 제정되는 등 여성의 지위향상과 권익증진이 시작됐습니다. 기초생활보장제가 도입되는 등 복지가 본격화했습니다. 10년 전, 여사님의 반려이자 동지인 대통령께서 먼저 떠나셨습니다. 그때부터 여사님은 대통령님의 유업을 의연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북한을 두 차례 더 방문하셨습니다. 영호남 상생 장학금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여사님은 유언에서도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사님께서 꿈꾸셨던 국민의 행복과 평화통일을 향해 쉬지 않고 전진하겠습니다. 영호남 상생을 포함한 국민통합을 위해 꾸준히 나아가겠습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헤쳐오신 여사님의 생애를 두고두고 기억하며,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겠습니다.여사님, 지금 가시는 그곳에는 고문도 없고 투옥도 없을 것입니다. 연금도 없고 망명도 없을 것입니다. 납치도 없고 사형선고도 없을 것입니다. 그곳에서 대통령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여사님,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사님이 계셨던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