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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는 572돌 한글날과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을 기념해 10월 9일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방문해 '왕의 숲길'을 걸어서 이동한 후 참배했다. 세종대왕 영릉 참배는 지난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 이후 24년만이다.

'왕의 숲길'은 2016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참고해 효종 영릉과 세종대왕 영릉을 연결하는 약 700m의 길을 정비한 이야기길이다. 현재 일반 관람객들에게 개방돼 운영 중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숙종(1688년), 영조(1730년), 정조(1779년) 임금이 행차할 때 효종 영릉을 먼저 참배 후 ‘왕의 숲길’을 지나 세종대왕 영릉을 참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먼저 효종의 영릉을 참배한 후에 효종 영릉과 세종 영릉을 연결하는 ‘왕의 숲길’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문 대통령은 일반 관람객들과 함께 한글 창제를 기리는 전통 음악과 창작 판소리 공연을 감상했으며, 가수 이수현씨는 이 자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은 방명록에 “한글, 위대한 애민정신을 마음깊이 새깁니다”라고 남겼다.

청와대는 세종대왕 영릉 방문 이유는 세종대왕의 애민정신과 한글 창제의 뜻, 한글의 가치와 슬기를 새기기 위해 한글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영릉을 방문하게 됐다고 밝혔다.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을 더욱 발전시키자는 의미도 담고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세종대왕 영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에 따른 후속조치로 복원 정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세종대왕 영릉 참배 행사에는 미술가 임옥상, 시인 박준, 가수 이수현, 디자이너 송봉규, IT분야 연구원 김준석 등과 아나운서 허일후, 동탄 국제고등학교 학생 박동민, 세종학당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한 외국인 소라비(인도), 몰찬 야나(벨라루스) 등과 함께했다.




▶4대 세종(世宗) 영릉

1)세종대왕 영릉의 역사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2) 세종 영릉의 구성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17대 효종(孝宗) 영릉

1)효종 영릉의 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2) 효종 영릉의 구성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비 인선왕후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